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파블로 피카소 - 전쟁과 예술

by yoyoz 2023. 3. 6.

피카소와 전쟁

피카소의 일생 (1881–1973)은 쿠바 독립 전쟁부터 그가 죽은 지 2년 만에 끝난 베트남 전쟁까지 큰 갈등으로 특징지어졌다. 
1901년부터 1973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 거주했던 스페인 예술가의 삶은 비록 역설적으로 그는 어떤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군인으로 복무한 적이 없었지만, 무력 충돌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 예술가는 군복무를 면제받았고 민간인으로서 20세기를 황폐화시킨 전쟁들을 경험했다. 그는 해방 이후 저항 예술가이자 운동가로서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발언은 그에게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부여했다. 피카소는 항상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사생활을 재조명하는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저널인 '저널'이라고 주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체주의가 고조되는 20세기가 펼쳐지면서 그는 이 저널을 통해 현대 삶의 갈등과 비극을 다시 이야기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항상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호전적인 모티브를 특징으로 한다. 1912년, 그 예술가는 그의 콜라주 중 일부에 발칸 분쟁에 대한 신문 오려낸 것들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전쟁은 피카소가 살았던 프랑스에 도착했고,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피카소는 새로운 책임에 직면했고 이것은 화가에게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박물관의 관장으로 임명된 그는 같은 이름의 마을에 대한 폭격에 대응하여 기념비적인 그림인 게르니카를 계속해서 그렸다.

 

파블로 피카소 - 1951년 1월 18일 발라우리스의 한국 대학살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점령은 그 예술가를 극도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주요한 격변으로 특징지어진 이 기간 동안, 현대 미술, 특히 피카소의 미술은 미국에서 성장하는 성공을 만나면서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퇴폐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 예술가는 파리의 그랑 아우구스틴 거리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 내부 망명의 형태로 감금되었다. 이 화실은 독일 화가와 지식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의 관계망의 진원지가 되었다. 일단 프랑스가 해방되자, 그 예술가는 자신과 그의 예술을 정치적인 대의에 헌신했다. 전쟁과 그 모티브는 평화와 상징과 함께, 인기 있는 인물이 된 작가가 제작한 전후 작품에 강하게 등장했다. 작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게르니카 그림은 그의 첫 공개적인 정치적 발언을 기록하면서 화가의 경력에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와 외국의 차관은 전시회의 접근 방식을 강화하고 주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짤막 상식-
극작가로서의 피카소 1941년에 파블로 피카소가 파리에서 쓴 6막의 희곡, 꼬리에 잡힌 욕망은 함께 식사하는 괴팍한 인물들의 고뇌와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황당에 가까운 초현실주의 스타일을 사용한다. 배고픔, 추위, 사랑은 이 연극의 세 가지 주요 주제이며, 점령 하에서 사람들이 겪은 고난을 반영한다. 1944년 3월 19일 레이리스의 아파트에서 루이즈와 미셸 라이리스, 제니 오비에, 발렌타인 위고, 도라 마르, 레이몽 퀴노,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가 처음으로 낭독을 맡았다. 그 낭독회는 점령된 파리에서 주요한 예술 행사였다.

 

 

댓글